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저 : 스티븐 그린블랫

역 : 이혜원

출판사 : 까치(까치글방)

발행 : 2013년 05월 15일

 

#1.

125p, 시간의 이빨

 

 고대 세계에서 조롱은 대단히 위력적인 것이었다. 교양 있는 이교도가 조롱거리로 삼은 것은 기독교인이 사용하는 언어 - 야만적이고 이질적인 히브리어나 아랍어에 기초해서 쓰인 그리스어 복음서의 조악함 - 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승자로 여기며 오만하게 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굴욕과 고통을 신성시하며 이를 찬양하는 기독교인의 태도 역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는 그 지위를 완벽하게 확립했을 때, 교회는 이러한 적대적인 조롱을 나타내는 표현의 대부분을 없애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독교 옹호자들의 인용문이나 요약문에 실려 있는 내용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모욕의 일부는 기독교에 맹렬히 반대하는 적들 사이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예수는 간통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를 잡놈이다. 예수가 신성한 존엄한 존재라는 일체의 주장은 그의 빈곤한 삶과 수치스러운 종말이 보여주듯이 명백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팔레스타인에서 온 구세주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학파가 던진 조롱과 그에 대한 특정한 이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교인이 에피쿠로스 사상 전체를 완전히 사장시키게 만드는 배경을 제공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이교도였지만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며, 그들의 사상은 승리한 기독교에 궁극적으로 영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神性)이라는 개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우리의 기도나 제의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성육신(成肉身: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등의 개념은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며 실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왜 인간은 자신이 벌, 코끼리, 개미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이나 앞으로 닥칠 억겁의 세월 동안 신이 다른 종의 형태가 아닌 인간의 모습을 취해야만 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왜 하필 유대인의 형상을 취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신의 '섭리' 라니! 합리적인 성인이라면 경험이나 관찰과 모순되는 그 같은 유치한 생각을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은 우물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개구리 떼 같았다. 그들은 소리 높여 개골개골 울어댄다. "세계는 우리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2. 30p, 발견의 순간

 그러나 성 베네딕투스가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독서로 인해서 어떤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읽는 내용은 물론, 그 밖의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 질문을 던져서는 안된다. 기회가 생기도록 해서는 안된다."

 일반적으로 매우 명료하게 기술된 회칙의 문장 중에서 "기회가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문구는 유독 모호하게 느껴진다.대체 누구에게 주어지는 혹은 무엇에 관한 기회란 말인가? 현대의 편집자들은 때때로 여기에 "악마에게" 라는 문구를 삽입하기도 한다. 어쩌면 회칙에서 암시하는 내용이 실제로 그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어둠의 제왕이 책의 내용에 질문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아무리 선의의 질문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3. 

 아일랜드인 수도사 콜룸바누스(그는 성베네딕투스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도 영향력 있는 수도원 회칙을 제정했는데, 그가 정한 회칙의 처벌 목록이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활발한 토론은 그 내용이 지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금지되었다. 감히 동료 수도사에게 "당신의 말은 틀렸소' 같은 말로 반박하는 자에게는 "묵언 수행이나 체벌 50대" 라는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수도사의 정신세계를 에워싼 드높은 벽은 이와 같은 침묵의 강요, 질문과 토론의 금지, 가벼운 체벌 심지어 채찍질을 해서라도 이 모두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지켜졌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신앙으로 뭉친 수도원이라는 공동체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며 쉼 없이 광범위한 호기심을 키워갔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 아카데미와는 달라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이 깔려 있었다.

 어쨌거나 수도하는 회칙에 따라 실제로 독서를 했으며 강제된 독서는 결과적으로 이례적인 연쇄작용의 시발점이 되었다. 독서는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특별히 가치 있게 여겨지거나 권장된 것도 아니었다. 수도원 사회에서 독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엄숙한 의무였을 뿐이다. 

 

 

#4.

 키케로가 대화체 형식으로 쓴 이 글은 장편이어서 상당히 큰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몇 개나 필요했다. 그러나 이 장대한 작품은 이런 대화체 형식의 글이 흔히 그렇듯이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끝났다. "여기에서 대화는 끝났고 우리는 헤어졌다. 벨레이우스는 코타의 의견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 반면, 나는 발부스의 의견이 진실에 보다 근접했다고 느꼈다." 키케로가 이렇게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지 않은 것은 지적인 겸손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키케로는 겸손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이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세련된 진솔함을 나타내는 방법이었다. 즉 이런 토론은 종국적인 결론을 맺기보다 오히려 의견의 교환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 함께 편안하게 논리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기지와 진지함에 함께 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하되, 결코 뜬소문이나 중상모략으로 번지지 않으면서 항상 반대의견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두는 것. 즉 가장 중요한 것은 토론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이렇게 썼다. "토론에 참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독점 사업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경쟁자를 대하듯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다른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차례를 가지는 것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5.

 묻혀 있던 도서관에서 탄화된 채 발견된 여러 책의 주제로 미루어보건대, 이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진 대화는 음악, 회화, 시, 연설기술, 그 밖에 교양 있는 그리스, 로마인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여러 주제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골치 아픈 과학적, 윤리적, 철학적 질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천둥, 지진, 일식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신들이 보내는 신호인가  아니면 순수한 자연현상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권력을 얻고자 전력투구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선과 악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후에 어떻게 되는가?

 유력인사였던 빌라의 주인과 그의 친구들은 이런 질문들과 씨름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꼈으며, 지극히 바쁜 삶 속에서도 기꺼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교육 수준, 계급, 지위에 합당한 존재 개념에 대한 가능한 답을 찾고자 애썼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살던 세계가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이례적인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한 통의 편지에서 그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들이 존재하기를 멈추고 아직 예수가 오지 않았던 바로 그때, 키케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 사이에 인류 역사상 유일한 순간, 인간이 올곧이 홀로 섰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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