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리처드 호프스태더

 

p. 49-50

 대체로 지적 능력과 지성의 질적 차이는 뭐라고 규정되기보다는 추정되는 데 불과한 경우가 많지만, 일반적인 어법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런 구분의 핵심을 추출할 수 있다. 이런 핵심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것 같다. 즉, 지적 능력은 아주 좁고 직접적이며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적용되는 두뇌의 우수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조작하고 조절하는 등의 극히 실질적인 특질이다 - 가장 뛰어나고 소중한 동물적 장점의 하나이다. 지적 능력은 명확하게 한정된 목표의 틀 안에서 작동하며, 그런 만큼 쓸모없어 보이는 사고방식은 재빨리 잘라내버린다. 게다가 지적 능력은 워낙 보편적으로 쓸모가 있기 때문에 그 작동이 일상적으로 관촬되어, 사고방식이 단순하든 복잡하든 똑같이 존중된다.

 반면에 지성은 두뇌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이고 사색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지적 능력이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고 정리하고 조절하는 것인 데 비해, 지성은 음미하고 숙고하고 의문시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상상하다. 지걱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 직접적인 의미를 포착하고 평가한다. 지성은 평가를 평가하고 여러 상황의 의미를 포괄적인 형태로 탐구한다. 지적 능력은 동물의 한 자질로서 높이 평가된다. 이와 달리 인간의 존엄성을 독특하게 표명하는 지성은 인간의 한 자질로서 높이 평가되는 한편 비난도 받는다. 양자의 차이를 이렇게 밝혀두면, 때로 누가 보더라도 예리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두고 왜 비지성적이라고 하는지, 마찬가지로 왜 분명 지성적인 사람들에게서 상당히 다방면에 걸친 지적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쉬워진다.

 

 

p. 51

 하지만 아무리 학문과 관련된 직종이라 할지라도 전문직 종사자를 말 그대로의 의미로 지식인이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지성은 대부분의 전문직에서 도움이 되지만, 지적 능력만 있어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학인이 모두 지식인이 아님을 알며, 종종 이런 사실을 개탄한다. 또한 지성은 전문직을 위해 훈련받은 지적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인물에 부속되는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회에서 지성과 지식인 계급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골치를 앓을 때, 우리는 일부 직업 집단의 지위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신적 자질에 담긴 가치도 염두에 둔다. 

 

 

p. 52

 이 문제의 핵심은 - 막스 베버가 정치에 관해서 한 구분을 빌리자면- 전문직 종사자는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에 의존해서 산다는 것이다. 직업적 역할이나 직업적 기능이 지식인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정신노동자이고 기술자이다. 또한 지식인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전문 업무상 요구되는 것이 아닌, 지식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업무에 동원한다. 프로페셔널인 그들은 판매하기 위한 지적 기능을 쌓아왔다. 다만 이 기능이 숙련된 것이라도, 업무상 요구되는 일정한 자질 - 치우침 없는 지적 능력,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자유로운 사색, 참신한 관찰, 창의적인 호기심, 근본적인 비판력- 이 없으면 지식인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집에서는 지식인일지 몰라도 직장에서는 주어진 목적을 위해 두뇌를 사용하는 정신적 기술자이다. 바로 이런 요소 - 지적인 과정 자체와 무관하게 외부에서 결정된 어떤 이해관계나 견해에 따라 목표가 정해진다는 사실-야말로 오직 하나의 관념에만 집착하면서 사는 광신자와, 두뇌를 자유로운 사색이 아니라 직업상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적 기술자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 경우에 목표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닌 반면, 지적인 삶에는 모종의 자발적 성격과 내적인 결단이 따른다. 지적인 삶에는 또한 나름의 독특한 안정감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안정감은 지식인이 지식에 대해 갖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두가지 기본적인 특질, 즉 장난기와 경건함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특질 사이의 균형에서 생기는 것 같다. 

 

 

p.57

 지식에 대한 관심이 아무리 헌신적이고 진지하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이 모종의 제한된 선입견이나 완전히 외적인 목적에만 봉사하게 되면, 광신이 지성을 삼켜버린다. 정신적 삶에서 지식에 자립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은 특수하고 제한된 지식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일이다. 그 영향을 신학만큼이나 정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극히 제한된 관점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지성의 기능이 훼손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경건함에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경건함이 너무 경직된 방식으로 행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지적인 기질에 있는, 내가 장난기라고 부르는 자질, 즉 정신의 놀이이다. 우리는 정신의 놀이에 관해 말한다. 지식인은 분명 정신의 놀이 그 자체를 즐기며, 이런 놀이에서 인생의 주요한 가치를 발견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지적인 활동으로 맛보는 순수한 기쁨의 요소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지성을 건전한 동물적 본능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정신 에너지의 잉여분은 실용성이나 한낱 생존에 필요한 일에서 해방될 때 작동한다. 실러는 "사람은 놀 때에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된다" 라고 말했다. 이런 격언이 나오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잉여가 인간에게는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베블런은 종종 지적 능력을 '게으른 호기심' 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장난기를 지닌 호기심이 너무 활발한 한, 이런 명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왕성함과 활발함이 바로 지성의 진리에 대한 시각이나, 도그마에 대한 불만을 특색있는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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